믿고 싶었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
어딘가 선아라면 당연히 나와 끝까지 함께하지 않을 거라 알고 있었기에.
믿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
어딘가 선아라면 반드시 나를 이해해주리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 어느 것을 선택한다고 해도 결국 거짓말쟁이는 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밤, 선아가 날 찾아오기 전까지.
그래, 막연한 불안이 탁하고 터진 그날 밤.
바람에 섞인 풀내음이 조금은 여름이 나가왔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9화 : 5월 23일 수요일 밤 ~ 24일 목요일 새벽 - 눈물과 미소의 소리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누굴 만나든!」
대뜸 선아가 날 쏘아붙여 온다. 난 그저 어젯밤 누구를 만나러 갔나를 무었을 뿐인데. 그녀의 과민반응이 그저 웃어넘기려던 나를 불안의 점점 더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아니, 난 그저 지국이 형이 말해준 그대로를 물었을 뿐인데, 그렇게 화낼 것까지 없잖아.」
그저 지국이형에게 말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였냐는 게 궁금한 따름이다.
「그냥 친구야.」
내 시선을 피하며 더 이상의 추궁을 금하는 듯 짧게 대답하는 선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아는 거짓말을 잘 하지 못 한다. 필시 그녀의 천성 탓이겠지. 그리고 그녀가 거짓말을 할 때는 그녀가 시선을 피하거나, 대답하고 싶지 않아 단답으로 말을 끝내고는 한다.
그리고 지금의 선아가 그렇다.
어째서 난 그 시점에 안도하고 만 것일까.
차라리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나는 너무나 안도했다.
선아에겐 현재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비록 내가 아닌 것일 뿐.
「친구 누구? 미선이? 아니면 향신이?」
그러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계속되는 추궁. 분명히 난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 한 발자국을 내딛지 말아야했다. 선아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않았어야 했다.
아니 사실 알았어도 상관은 없으려나.
그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을 사람에 불과하니깐.
단 한 가지의 점을 제외하고는.
「이제 그만!! 더 이상 듣기 싫어!! 뭐가 그렇게 궁금해?! 뭐가 그리 알고 싶어?! 뭐가 그렇게 바보가 되고 싶은 거냐고, 오빤!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잖아! 그냥 그렇게 차근차근 진행해나가면 되는 거잖아! 그냥 그렇게 헤어지면 되는 거잖아!!!」
선아가 소리를 지른다. 그녀의 모습은 절규나 다름이 없어서 보는 내 쪽이 먼저 가슴이 찔리듯이 아파왔다.
그러나 선아는 나의 아픔에도 상관하지 않는 듯,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래, 오빠. 우리는 이제 헤어지는 거야.」
이기적이다.
선아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항상 자신을 위주로 생각하고, 거짓말을 못한다. 그리고 당황하거나, 흥분을 하게 되면 이상한 입버릇 같은 게 생기고, 좀 둔한 면도 있는데다가 심지어 덜렁대기까지 한다.
그래, 선아는 아직 어리다.
그리고 그런 선아가 난 좋았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가 좋았던 것이다.
「그렇구나. 이제 우린 헤어지는 거구나.」
계속 내 입은 내 머리를 배신하다.
선아는 아직도 그 울 듯 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충격적인 이별선언에도 어째서 나는 선아의 그 표정이 너무나 귀엽고, 자업자득일터인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걸까.
「전시회에 걸려있던 오빠의 그림…또 쓸쓸하기만 한 풍경이었어.」
아, 그 골목 그림말인가.
꼭 한 번은 지나가고픈 그 골목.
그리고 그려 넣지는 않았지만 그 골목 안에서 선아가 날 뒤돌아보며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오빠에겐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어. 나에겐 없는 재능이 말이지. 근데 오빤 그 재능을 도무지 쓸 생각을 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오빠에게 맞지 않는 그림을 그리느라 그 재능을 소진해나가고 있어. 난 그게 싫어서 - 그게 정말 싫어서, 정말 오빠가 그려야하는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아, 눈물.
선아의 눈물을 닦아주려 내가 손을 가까이 대자 선아는 나의 팔을 탁하고 쳐낸다.
「난 나한테 재능이 없는 걸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남의 재능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난 가장 가까이에서 오빠의 재능을 지켜봤어. 하지만 그것도 결국 부질없어, 그딴 거. 나에겐 없는 오빠의 재능이 그따위로 사라져 나가는 게…
지쳤어, 지쳤다고!!!」
다시 선아는 절규하듯 - 정말 괴로운 듯 소리 질렀다.
자업자득은 나였다.
선아는 날 이해해주었지만, 난 선아를 이해해주지 못 했다.
그러니깐 이건 내 잘못.
선아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나의 잘못.
「오빠. 이제 알겠지? 이제 내가 하려는 말 잘 알겠지? 이제, 이제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알았지? 그러니깐 이제 이것도 끝. 철수 오빠의 선아도 이제 이걸로 끝. 선아의 철수 오빠도 이제 이걸로 끝.」
한줄기 떨어지던 눈물도 이젠 방울져 떨어져 내린다.
선아는 무엇이 그렇게 슬픈 걸까?
나와 헤어지는 게? 아니면 나보다 더 재능을 더 잘 사용하는, 선아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날 버리는 게 미안해서?
「자, 철수 오빠. 이제 우리 헤어지자.」
눈물져 떨어지는 미소.
그 순간 난 언젠가 반드시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아의 저 미소만큼은 반드시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아가 이야기한 내 재능을 모두 이용해서라도.
반드시.
눈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소에도 그 만의 소리가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4339. 12. 29. 02:07 a.m.
written by 백승훈/민승아 with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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